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영화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 깃든 감정과 상징들은 관객을 끝없는 해석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영화는 주인공 종수(유아인)의 시선에서 전개되며, 그의 세계에 스며드는 두 인물, 해미(전종서)와 벤(스티븐 연)을 중심으로 불안과 긴장의 리듬을 조성한다. 마치 현실과 환상이 겹쳐지는 듯한 이 영화는 관객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답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이 모호한 불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세 인물, 세 가지 세계 – 불완전한 조각들이 만들어낸 긴장
종수는 꿈을 좇아 상경했지만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이다. 아버지의 법정 문제를 떠안고, 자신만의 글을 쓰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해미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녀의 등장은 마냥 반갑기보다는 어딘가 위태롭다. 해미는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말하며, 사라져버릴 듯한 기이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녀는 환상을 좇는 인물이며, 종수에게도 현실 너머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하지만 벤의 등장은 이 미묘한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는 종수와 정반대의 인물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모든 것이 손쉽게 해결되는 듯한 삶을 산다. 벤의 미소는 다정하지만 차갑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이 스며 있다. 그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하며, 불꽃이 되어버린 듯한 해미와 종수의 관계에 불을 지핀다. 그의 말이 비유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순간부터 영화는 더욱 깊은 미스터리로 빠져든다.
감각의 세계, 불길한 정적 – 이창동이 만든 신비로운 공간
버닝은 설명이 필요 없는 강렬한 감각의 영화다. 미묘한 표정 변화, 고요한 순간의 긴장, 음악 없는 정적 속에서 흐르는 감정의 파동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특히 황혼 속에서 해미가 보여주는 ‘작은 굶주림’ 춤은 영화 전체를 압축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몸짓은 자유롭지만, 그 안에는 감춰진 슬픔과 상실이 담겨 있다. 그 순간 종수는 해미를 이해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자신과 얼마나 다른 세계에 있는지를 깨닫는다.
또한, 영화는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해미는 정말로 존재하는가? 벤은 누구이며, 그는 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가? 마지막 장면에서 종수가 내리는 선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는 이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며, 관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결국 버닝은 단순한 미스터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불안, 불공평한 현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창동 감독이 던진 수수께끼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타오르는 이 불길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