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 사회는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군사정권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고, 경제는 격변을 겪으며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법과 질서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권력과 돈을 움켜쥐려는 이들이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바로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나쁜 놈’들이 어떻게 살아남았고 또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치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감독 윤종빈은 한국 영화 역사에서 손꼽히는 범죄 영화로 이 작품을 남겼다. 조직 폭력배와 부패한 공무원,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와 사회적 구조까지 세밀하게 묘사하며, 단순한 갱스터 무비를 넘어선 시대극으로 완성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주먹질과 총격전만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서 권력의 속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 최민식이 연기한 ‘최익현’이라는, 어딘가 찌질하면서도 처절한 인물이 서 있다.
최익현,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남자
영화의 주인공 최익현(최민식)은 전형적인 ‘낀 세대’다. 부패한 공무원으로 살아오다가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고 한순간에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처한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길은 바로 조직폭력배들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진짜 조폭이 아니다. 오히려 입만 살아 있는 기회주의적인 캐릭터다. 늘 어딘가 얄밉고 능글맞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는 인물. 그가 온갖 수를 써가며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모습은 어쩌면 당시 한국 사회를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의 자화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최민식의 연기는 이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와 능청스러운 표정,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보여주는 소심한 몸짓까지.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정말로 ‘이 시대에는 이런 인물이 실제로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특히 권력자들에게 빌붙으려 애쓰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이 캐릭터의 모습은 씁쓸하면서도 묘한 유머를 자아낸다.
최형배, 진짜 ‘나쁜 놈’이란 이런 것
반면, 하정우가 연기한 최형배는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전형적인 ‘조직의 룰’을 따르는 갱스터다. 최익현처럼 요령을 피우기보다는, 단호하게 행동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하정우는 이 캐릭터를 단순한 악당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조직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때로는 부하들에게 따뜻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는 강한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최익현과의 관계에서 점점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과정은 영화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하정우의 연기는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강렬하다. 불필요한 감정 과잉 없이도 눈빛 하나로 분위기를 압도한다. 그는 단순한 조직 폭력배가 아니라, 시대를 지배하는 진정한 ‘권력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그가 결국 선택하는 결말은 관객들에게 많은 여운을 남긴다.
‘나쁜 놈들’이 살던 시대, 그리고 그 시대의 종말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 범죄와의 전쟁은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그려낸 작품이다. 1990년대 초반, 한국 정부는 대대적인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조직 폭력배들을 소탕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권력이 어떻게 바뀌고 시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결국 최익현도, 최형배도 시대의 흐름 앞에서는 무력하다. 최익현은 자신이 쌓아올린 권력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최형배 역시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가 없는 세상을 마주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한 갱스터 무비처럼 폭력과 배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만든 악당들’이 결국 시대에 의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마냥 통쾌하거나 정의의 승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윤종빈 감독은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강렬하게 조명했다. 그리고 최민식, 하정우를 비롯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이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인물들, 그들이 펼치는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준다. 1980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영화가 여전히 현대 관객들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권력과 생존’이라는 본질적인 이야기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일 것이다.